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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020

대게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일수록

터무니 없는 약속을 한다.

여자들의 어리석음은,

내 남자만은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025

사거리에서는 헤어지지 말자.

뒷모습이 슬픈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

택시를 타고 미련 없이 떠나도 좋으련만,

한 시간째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

함박눈이 퍼붓는 한밤중에는 더더욱 헤어지지 말자.

삿포로의 겨울은

이별하기에 너무 추운 곳이므로.

삿포로의 저녁은

이별하기에 너무 아름다운 곳이므로.

 

 

#038

누구나 처음에는 커피포트처럼 뜨거워지지.

하지만 나중에는 불탄 배처럼 가라앉게 마련이야.

알아 나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단 한 번도 너를 위해 울지 않았다는 거.

누구와도 취할 때까지 마셔보지 않았다는 거.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취해 있잖아.

그러니깐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달도 없는 무표정한 밤이잖아.

너무 춥잖아.

 

 

#040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난 여기에 서 있겠지.

아마 엔진을 켜둔 채"

-델리 스파이스, <항상 엔진을 켜둘게>

<항상 엔진을 켜둘게>를 듣다가

엔진을 끈다.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엔진을 끄고

음악을 끄고

마음도 끈다.

꺼지지 않는 달빛만 교교한 밤이다.

 

 

#044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도 레종 데트르, 마시던 맥주를 츨려도 세라비.

친절하게 그는 레종 데트르는 '존재 이유'이고 세라비는 '그게 인생이야'라는 뜻이라고 말해준다. 

 

 

#049

그녀가 어디근 가자고 했을 때,

어디든 갔더라면.

그녀가 술잔을 비우다 말고 어깨를 들썩일 때,

가만히 안아주었더라면.

그녀가 무릅을 베고 누웠을 때,

모른척하고 입맞춤했더라면.

우린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내 맘이 움직이지 않은 거겠지, 그떄는.

떠났으니까 그리운 거겠지, 지금은.

 

 

#118

마음을 멈추고 당신을 본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괜찮지 않느 밤이 온다.

창밖의 나무는 고요가 무성하고

아주 괜찮은 듯 서 있다.

당신은 언제나 떠나고 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아프지 말아요'라고 말하던 그리움은

아프게 입술에 남아서

버릇처럼 '걱정 말아요'를 중얼거린다.

지나친 것들은 지나치게 나를 괴롭혔다.

가벼운 구름의 열망과

헐거운 방랑의 열정도

내내 길 위에서 시들었다.

늦은 밤, 늦어서 미안한 빗방울만이

토닥토닥 창문을 위로한다.

 

 

 

이용한 여행에세이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중에서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저자
이용한 지음
출판사
상상출판 | 2012-05-17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떠나고 싶은 갈망을 현실로 옮기게 하는 에세이의 유혹 길에서 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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