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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식물



 "민식 씨, 정말로 나를 사랑하세요?"

 어느 날 교회를 나서며 정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정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몇 번이나 정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우리 우연히 만나기 연습 한번 안 해보실래요?"

 "우연히 만나기 연습?"

 "전화 걸어서 만난다든가 약속해서 만나는 거 말고 그냥 우연히 생각지도 않았던 자리에서 만나기."

 "이제 헤어지자는 얘기로군."

 "치사한 소리 하기 없기예요."

 "그럼 무슨 뜻이지?"

 나는 약간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녀가 나를 피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고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고 싶어하면 그게 된대요. 어제 어떤 책을 읽었는데 거기 그렇게 씌어 있었어요."

 "활자를 미신처럼 믿지 마."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 퍽 자신이 없으시군요."

 "자신이 있어, 그것만은."

 "그럼 우리 우연히 만나기 연습 한번 해보기로 해요."


(중략)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시린 가을비를 맞으며 시립문화회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민식 씨"

 길 옆 가겟방에서 불쑥 정희가 나를 부르며 뛰어나왔다.


 "드디어 만났군요."

 그러나 매우 낯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온통 뽀글뽀글하게 볶아서 내가 알고 있던 정희와는 전혀 다른 정희로 변해 있었다. 약간 섭섭했다.


 "우리는 비하고 무슨 인연이 있나 부죠. 

  우리가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날도 비가 왔었잖아요. 그때도 민식 씨는 우산이 없었어요."

 그녀가 우산을 내 머리 위에다 얹어주며 하는 말이었다.

 "우린 비하고 인연이 있는 게 아닐 거야. 만약 비하고 인연이 있었다면 우린 여름 장마철 날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어야 했지."

 여름 장마철, 그때는 꽤나 거리를 헤매었더랬지. 그러나 이 여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주지 않았었다.


 "하여간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상대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단지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 속에도 실지로 존재하고 있음을 한번 믿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 속에는 그런 것들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 그녀와 나는 아무런 의미의 끈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지내는 사이 날마다 헤매면서 내가 알아낸 것은 고작 그것뿐이다.


 나는 줄곧 없는 것을 찾아 헤매었던 셈이다. 환상,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찾아 이 도시의 곳곳을 홀로 헤매어보았던 것이다.


(중략)


 사랑이란 애초에 현실적인 것이 아님을 나는 지난 여름 그 방황들 속에서 이미 알았고 지금 내가 이렇게 추위 속을 헤매는 것은, 내 가슴 안에 환상이라도 하나 만들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환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이렇게 추위 속을 서성거리다 막상 그녀를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두었던 그녀에 대한 환상을 모두 지우고 그만 그 자리를 떠나버릴 심산이었다.


 바다엘 가보니 이미 그것은 바다가 아니더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는가. 마음 안에서 사랑한 것은 영원히 마음 밖에서는 만날 수 었다.


 내가 이 겨울에 가지는 모든 센티멘털은 이 겨울리 가면 나를 조금은 나이 들게 해줄 것이고 가능하면 나는 이 겨울을 마지막으로 환상 따위는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외수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중에서




꿈꾸는 식물

저자
이외수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10-09-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벗어나리라, 내 숨이 다하기 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삶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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